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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 두번째

by 책하나 201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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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리뷰에 이어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편 두 번째 리뷰입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동양의 관점인 일원론, 서양의 관점인 이원론,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동양의 관점인 일원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오랜 시간 정리된 문서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앉다’라는 뜻인 이 문서는 [베다]의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 중 핵심이 되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와 했다고 봅니다.
(우파니샤드)의 탐구 주제는 전체로서의 세계, 부분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이 둘의 관계입니다. 세계를 ‘브라흐만’ 자아를 ‘아트만’으로 설명합니다.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라고 합니다. (우파니샤드)의 결론은 “네 밖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실체와, 네 안에 펼쳐진 자아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하나다”범아일여 사상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결론입니다. 우주와 세계는 나 밖에 존재하는 것이고, 나 혹은 자아라는 것은 내 몸 안쪽에 있는 것인데, 이 다른 것들을 하나라고 말하는 범아일여의 사상은 지나치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 사상을 수없이 말하고, 범아일여는 깨달음과 해탈의 길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3장 베다에서 (우파니샤드) 힌두교를 다루며 인도를 관통하는 사상 범아일여의 사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장 도가에서는 노자와 공자의 사상을 살펴보며 중국 사상의 핵심인 우주적 질서인 도와 개인의 내면인 덕을 일치시키는 도덕일치 사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붓다 초기의 가르침과 이후 등장한 대승불교를 기술하고, 자아가 내면 안에서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려는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알아봅니다.
노자 공자, 붓다 위대한 스승들은 다양한 지역과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보편적 가르침은 일원론 ‘세계와 자아가 그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였습니다.

https://youtu.be/puDDvogwqa4

서양의 이원론적 사유는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고 각각을 독립적인 실체로 파악함으로써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빠른 성장의 역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원론이 자연을 대상으로 분절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변형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서양의 산업화를 이루는 데 기여합니다. 오늘날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풍요는 이원론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자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만들어 냈고 이 고통은 다시 인간의 고통으로 전이되었습니다. 생태계 파과와 환경 교란으로 기후변화가 인류의 재난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원론의 시작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통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데아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데아 세계란 절대적이고 불변의 이상세계를 말합니다.
이후 서양인의 세계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완벽하고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진짜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실의 세계입니다.
변화하고 불완전하며 우리의 오감에 의해서 경험되는 허상의 세계입니다. 이데아론은 세계를 이처럼 둘로 분절한다는 의미에서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서양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의 실제 의미는 서양사상이 이원론적 형태를 띠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종교, 철학, 학문, 사회, 문화, 정치에 이르기까지 이원론적 분절로 세계를 이해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이분화하는 데 익숙합니다.
신과 인간, 천국과 지옥, 선과악, 빛과 어둠,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마음과 몸, 서양과 동양,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등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그것을 분절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서양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철학과 기독교를 뿌리로 합니다. 이 두 사상은 대립하였다고 알려졌으나그 본질에서 이원론의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2천 년의 역사 동안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원론은 오랜 시간 서양을 지배해왔습니다. 서양철학은 근대에 이르러 일원론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이원론을 유지했습니다. 신의 완전무결함은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절대적으로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일원론적 탐구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일원론적 사유가 특정 지역과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상의 모든 지역과 시대를 포괄하는 보편적 사유방식임을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스승들이 가르침으로 항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요?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해야 합니다. 가족, 학교, 사회, 국가, 종교, 미디어가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당신을 주저앉히려 할 때, 당당히 ‘아니요’라고 말하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의 하루 중에서 버려지고 흩어져 있는 시간을 모아 남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TV를 끄고 SNS를 닫고, 당신의 모든 시간을 분주하게 만드는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당신의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눈과 귀를 닫고, 호흡을 가다듬고, 평온히 내면에 머물며, 끝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잡다한 생각이 잠잠해질 때 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야 합니다.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편안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다섯째, 많은 날이 지나고 충분한 시간이 흘러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졌다면, 그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되었다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 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 해야 합니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중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 속에 당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당신 속에 있는 것이 또 다른 일원론의 세계입니다. 또 다른 세계 앞에 당신은 망설일 수도 있고, 발을 내디딜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은 독자의 관점에서 어느 사유가 맞다 아니다를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이 사유 속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는 존재입니다. 이원론의 사고에서 일원론의 사고로 나아가는 것도 ‘나’이고, 이원론에 계속 머물고 싶은 것도 ‘나’입니다. 지평을 넓히고 지식을 넓히는 이유가 진정한 ‘나’의 존재를 아는데, 어쩌면 타인일 수도 있는 내 안의 소리를 구별하는 일에 쓰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입니다.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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