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진 씨는 여자 친구와 졸연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졸혼 은 들어 봤는데 졸연은 뭐예요?”“결혼 생활을 졸업하는 게 졸혼 이라면, 연인 관계를 졸업하는 게 졸연 이에요.”
“그게 이별이랑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이별은 끝이지만 졸연은 쉼이에요. 여자 친구와 결혼 시기를 두고 의견 차가 커서 만나면 자꾸 싸우기만 하더라구요. 그래서 3개월 떨어져 있기로 했어요.”
“각자 결혼이냐 이별이냐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겠네요.”
결국 헤어지게 되어 이 3개월의 시간이 이별의 수순이 될지라도, 감정적이기만 한 이별이 아닌 현명한 헤어짐이라면 상진 씨나 그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만나는 법보다 헤어지는 법이 더 어렵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과 헤어지지?’
‘정말 헤어지는 게 맞을까?’
누구나 살면서 이별을 고민하는 순간이 옵니다. 빨리 끝내고 싶어 단호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 만남을 위해서 ‘ 잘 끝내야 합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도 슬프고 억울한데 다음도 그 모양이라면 끔찍할 수 있겠지요?’
작가는 이혼을 앞둔 부부가 상담하러 왔을 때 쟁점은 ‘화해’가 아니라, 어떻게 잘 헤어지게 할까라고 말합니다.
잘 헤어지고 다음에 다시 만나는 편이, 서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며 붙들고 있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을 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합니다.
앞선 상진 씨의 커플의 ‘3개월간의 졸연 기간’은 현명합니다.
보통의 헤어짐은 격정적인 감정만 동원되기 마련인데, 이런 시간을 가지면 관계에 대해 사색하게 됩니다. 관계의 미래를 가늠함으로써 헤어질지 말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별을 고민할 때는 이런 주체성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피해의식이 드니 상대에게 매달리거나 집착하게 되고, 심지어 헤어지자는 연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까지 생깁니다.
‘생각은 0 이고 감정만 100인 상태’는 서로에게 좋지 않습니다.
이별을 생각중이라면, 맥없이 상대에게 끌려 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줍시다’
이혼 전에 숙려기간을 갖는 것처럼 말입니다.
법적인 관계가 아니더라고 이런 숙려기간은 큰 도움이 됩니다.
두 사람 합의하에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손을 잡았음에도 변한 것이 없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돌아서는 길뿐입니다. 하루아침에 버려졌다는 상실감을 남기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한 번쯤은 ‘이 사람만큼 나를 잘 맞춰주는 사람도 없는데,’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한 사람만 이런 특혜를 독점해온 데 있습니다.
번갈아가며 ‘관계의 이득’을 누려야 하는데 받는 사람은 계속 받으려고만 하고 주는 사람은 늘 줘야하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관계가 주는 안락함에 빠지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통제하려고 합니다.
잘 헤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런 엇갈림을 정리하고 각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정말 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가? 나도 나의 필요가 우선인 건 아닌가? 그렇다면 관계라는 미명 하에 애매한 사람을 만나 시간을 소비하기보다 나의 필요를 위해 힘쓰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지 못하고 상대와 만나면 진정한 의미의 관심과 배려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 상대가 내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영 이 사람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아요”
관계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한 쪽이 힘이 없어지면 반대쪽은 자연히 없어집니다.
다만 혼자 결정하고 혼자 빠져나와야 합니다. 놓은 과정에서조차 상대의 동의나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손을 놓은 순간 사실상 기존의 관계는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잘 헤어지는 것은 파괴를 향한 질주를 멈춘다는 말입니다.
브레이크가 필요합니다.
‘나는 더 이상 지금의 ’너의 상태‘를 용납하지 않겠다’ 는 의사를 상대에게 선포하는 것, 그것이 브레이크입니다.
브레이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차를 운전할 때 우리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순간 당연히 브레이크를 밟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관계가 파괴 양상으로 치달을 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합니다.
관계는 양방향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것입니다. 그 균형이 무너졌을 때 이별을 고해야 합니다.
이별을 결심했다면, 상대에게도 본인 고민시간의 절반이라도 내어 주길 바랍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그 시간만큼 고민하고 생각하고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책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2번째 리뷰이었습니다.
한 번으로 아쉬운 마음에 2번째 리뷰 까지 만들었습니다.
책의 목차 가운데 ‘좋은 이별’이란 소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물론 읽다보면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은 이별’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별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다만 그 상처가 깊지 않고 빨리 아물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이별 전 숙려기간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좋은 이별’보다 ‘건강한 이별’을 준비하는 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